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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3.05.06 조회수 : 2652

[문화일보] 보험 든 후 한 달만에 홀인원… 500만원 횡재, 이후 골프채 유통 ‘톱5’·베스트스코어 겹경사


[문화일보 - 스포츠] 나의 골프 이야기

보험 든 후 한 달만에 홀인원… 500만원 횡재, 이후 골프채 유통 ‘톱5’·베스트스코어 겹경사
이갑종 ㈜오리엔트골프 대표

이갑종(63) ㈜오리엔트골프 대표는 요즘 사업도, 골프도 황금기를 맞고 있다.
이 대표가 일본에서 수입판매하는 ‘야마하 골프채’는 골프채 유통 시장에서 ‘톱5’에 들었다.
이 대표가 골프에서 생애 베스트 스코어와 유일한 홀인원을 기록한 것도 최근 일이다.

그는 골프를 친 지 20년이 넘었지만 제대로 시작한 것은 10년 정도밖에 안 됐다.
1990년부터 골프채 판매업을 해 온 그는 1996년 금호그룹으로부터 야마하 골프채에 대한 수입판권을 인수하면서 나홀로 서기를 시작했다.
연 10억 원대이던 매출은 지난해 530억 원을 돌파할 만큼 급성장했다.
그는 클럽 부문만을 따지면 사실상 1위라고 했다.

이 대표의 골프실력은 회사 경영실적과 비례했다.
매출이 늘고 흑자가 나기 시작하면서 그의 골프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골프 사업 시작 후 2년 만에 연습을 시작했지만 늘 사업자금에 쪼들렸기에 제대로 연습할 형편도 못 됐다.
늘 돈 걱정 탓에 연습에 몰입할 수 없었던 것.

2005년 서울 서초동으로 사옥을 옮기면서 인근 골프연습장에서 본격적으로 골프채를 잡았다.
50대 중반에 골프채를 다시 잡은 탓에 6개월 동안 레슨을 받았지만 실력 향상이 없었다.
필드에서 처음에 공을 치면 페어웨이를 벗어나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상대가 무안할 정도로 못 쳤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스윙을 배운다고 말한다.

이젠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스윙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손이 클럽과 이루는 각도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레슨프로의 말도 몇 년 지난 이제야 깨우치게 됐고, 이후 실력도 자연 늘더라는 것.
또 워낙 큰 백스윙 탓에 ‘스웨이’가 심해 백스윙 때는 공을 볼 수 없었고, 치고 나서도 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젠 스윙을 줄이고 팔을 좀 더 많이 올려서 치는 폼으로 바꿨더니 공도 잘 보이고 안정된 샷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2년 전 강원 고성군의 설악썬밸리 밸리코스 6번홀(파3·120m)에서 생애 첫 홀인원을 기록했다.
지인 부부와 라운드에서 9번 아이언을 잡고 친 공이 바람에 휘면서 핀 앞에 떨어지더니 홀로 사라졌다. 홀인원 보험금으로 500만 원을 탔다.
이 돈으로 동반자와 함께 일본 구마모토(熊本)로 여행을 다녀왔다.
사실 그는 홀인원하기 한 달 전 홀인원 보험을 들었다.
함께 회사를 일궈 온 아내(안정자 상무)가 거래처 은행 직원의 권유로 홀인원 보험을 들게 됐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곧바로 보험에 가입했다.
그는 홀인원 이후 지난 4월 경기 용인시의 코리아골프장 파3홀을 앞둔 그늘집에서 대기하다 앞 팀의 홀인원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의 베스트 스코어는 78타였다.
2011년 코리아골프장에서 기록했다.
몇 해 전 79타를 쳤지만 동반자들이 워낙 조용한 그를 보고 “이번이 ‘칠자’ 처음 아니지?” 하는 바람에 싱글패는 받지 않았다.
요즘도 80대 중·후반은 친다. 그는 지난해 4월 고교동창 골프모임이 있던 코리아골프장에서는 10홀 연속 파 행진을 벌인 적도 있다.
특히 10번째 홀에서 기록한 파는 30m짜리 퍼팅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의 비거리는 한때 230m를 나갔고 요즘도 210m는 너끈히 보내는 장타자다.
주변 사람들이 그의 장타를 부러워했지만 정작 장타가 골프실력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됐다고 말했다.
야구명문 성남고를 나온 그의 동기들 중 야구선수 출신이 많아 아직도 고교동창 골프모임에서 장타상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맨투맨’ 영업으로 시작한 그는 지금도 직원수나 마케팅 비용을 줄인 ‘짠돌이 경영’을 고수하고 있다.
업계 최초로 구입하기 전 반드시 쳐보게 하는 ‘시타(試打) 마케팅’을 시작하면서 소비자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선두주자들과 경쟁하기 위해 시타채를 대리점마다 갖다 놓고 ‘반드시 쳐보고 구입하라’고 광고를 했다.
당시 모 신문의 ‘공짜는 즐거워’라는 코너에 소개되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사상 첫 공중파 TV에 광고를 내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 덕에 브랜드파워를 높일 수 있었다.
남이 안 하는 것은 해볼 것 다 해 봤다 해도 과언 이 아니다.

그는 골프채 판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품질, 마케팅, 그리고 판매를 담당할 대리점이라고 꼽았다.
지금도 이 대표는 용품업계 중에서는 가장 광고를 많이 하는 브랜드로 정평이 나 있다.
“돈 아깝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것 없다”는 그는 광고라는 수단을 통해 정면 돌파를 해가고 있다.
여성채 판매 비중이 전체의 35%나 될 만큼 높아 일본 본사에서 이 대표가 제안한 디자인을 기꺼이 수용할 만큼 ‘바잉 파워’도 키워갔다.

아내 안 상무와는 회사에서는 죽이 잘 맞는 콤비이지만 골프장에서는 ‘남보다 못한’(?) 사이다.
그가 아내의 스윙이 잘못됐다고 지적해주면 ‘잔소리’로 치부하며 고집을 꺾지 않아 부부싸움 위기까지 갈 때도 종종 있다고 한다.

최명식 기자 mschoi@munhwa.com